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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가는대로

새벽 흥덕왕릉(興德王-陵) 찾아가며...

by 감홍시 2009. 8. 26.

 

 

 

 

 

 

 

 

 

흥덕왕릉(興德王-陵)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 사적 제30호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 ~ 836, 김수종/김경휘)을 모신 곳이다.
왕은 지금의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차 씨를 들여와 재배하도록 하였다.
밑둘레 65m, 직영 22.2m, 높이 6.4m 되는 이 능의 둘레에는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겼고 그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다.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있고, 앞쪽에는 문인석 무인석을 세웠는데, 무인석은 서역인 모습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과 함께 매장했다.' 고 하였다.
1977년에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과 함께 '흥덕' 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흥덕왕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 채 남았다.
당시의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흥덕왕릉은 안강읍 북쪽에 있는 어래산의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말단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육통리 마을에 바로 접해 있는 뒷산에 있다. 전형적인 풍수지리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능은 지금까지 신라의 왕릉으로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경주분지와 접한 남쪽의 산간에 위치하는 것에 비하여 북쪽으로 멀리 안강에 위치하여 다른 것들과 비교된다.

 

능은 봉분의 크기가 직경 22.2m, 높이 6.4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하단에는 1.3m 높이로 둘레돌(護石)을 돌리고, 둘레돌의 면석(面石) 사이 탱석(撑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양각하였다. 둘레돌에서 1m 거리를 두고 능 둘레에는 1.9m 높이의 석난간(石欄干)을 돌렸는데, 석난간의 석주(石柱)는 2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실 내지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능의 바로 앞에는 상석(床石)과 후대에 설치한 향로대(香爐臺)가 있고, 능을 둘러싼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전방으로 얼마간 떨어져서 동·서 좌우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는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다. 전방 좌측에는 석비(石碑)가 있었으나 비신(碑身)과 이수(이首)는 없어지고 머리가 일부 결실된 귀부(龜部)만 남아 있었는데, 1977년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시 상당수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흥덕왕릉은 전체모습이 괘릉(掛陵)과 비교되는 것으로 신라왕릉 최전성기의 완성된 양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신라의 왕릉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돌방무덤(石室墳)으로 변하였고, 돌방무덤은 둘레돌(護石)의 양식에 따라 냇돌(川石)이나 자연석을 이용한 돌담식, 치석(治石)한 블록형 또는 장대석으로 쌓은 것, 또는 여기에 갑석(甲石)과 지대석(地臺石)을 갖추어 기단화한 것, 거대한 판석으로 둘레돌을 만들 때 불탑(佛塔)과 같이 탱주와 면석을 구분한 것, 그리고 둘레돌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고 봉분 기저에 석난간을 돌리며 능 앞에 문무석인상(文武石人像), 사자상(獅子像), 화표석(華表石), 능비(陵碑) 등을 배치한 것 순으로 바뀌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형식들 가운데 이 흥덕왕릉(836년 축조)은 마지막 형식에 해당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권10에 의하면 “조정이 왕의 유언에 의하여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라고 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편에는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했다(陵在安康北比火壤與妃昌花合葬)”라고 해서 왕릉의 현재 위치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확실한 위치가 알려진 신라의 왕릉 가운데 하나가 흥덕왕릉이어서 당시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상을 보여 줄 수 있는 기준이 되고 있다. (출처 :  新羅五陵測量調査報告書(姜仁求 外,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흥덕왕(興德王)

 

 

성 김(金). 이름 경휘(景徽). 초명 수종(秀宗)·수승(秀昇). 원성왕의 손자이며 헌덕왕의 동생으로,

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김씨(金氏). 819년(헌덕왕 11) 이찬(伊粥 )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822년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갔다. 즉위하자 당(唐)나라에 사신을 파견, 당 문종(文宗)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고,

828년(흥덕왕 3) 대아찬(大阿粥) 김우징(金祐徵)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이 해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서 재배, 이때부터 차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다.

834년 복색제도(服色制度)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였다. 유언에 따라 경주시 안강읍 북쪽에 있는 장화부인,

즉 정목왕후(定穆王后)의 능에 합장되었다.

 

 

 

 

 

 

 

 

 

 

 

 

 

 

 

 

 

 

 

 

 

 

 

 

 

 

 

 

 

 

 

 

 

 

 

 

 

 

 

 

 

 

 

 

 

 

 

 

 

 

 

 

 

 

 

 

 

 

 

 

 

 

 

 

 

 

 

 

 

 

 

 

 

 

 

 

 

 

 

 

 

 

 

 

 

 

 

 

 

 

 

 

 

 

 

 

 

 

 

 

 

 

 

 

 

 

 

 

 

 

 

 

 

 

 

 

 

 

 

 

 

Tip

 

흥덕왕릉은 괘릉(경주 외동)은 비슷한 분묘형식과 십이지신상을 배치 하였습니다.

또한,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서역인의 동상 역시 같은 형식 입니다.

 

여행을 하시며 흥덕왕릉을 찾으신다면,

경주 외동의 괘릉과 함께 연관하여 여행의 선을 이어 가는 것도

좋은 소재의 여행 동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38대 원성왕(김경신)에서 제42대 흥덕왕

두 왕의 공통점은 '물(水)' 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물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원성왕은

홍수로 인해 원성왕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이 강을 건너지 못함에

왕으로 추대 되었고,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상권을 장악한 바다의 왕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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