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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가는대로

경주 괘릉에서...

by 감홍시 2009. 4. 29.

 

 

 

 

 

 

 

 

경주 괘릉(掛陵) : (사적 제 26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산17 )

 

원형의 봉토분으로 앞에 석상(石床)을 놓았고, 아랫부분의 주위에는 다듬은 석재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그리고 호석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의 판석(板石)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甲石)을 얹었고, 각 판석 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키는 탱석(撑石)을 끼워 넣었으며 12지신상을 2개의 판석마다 하나씩 배치했다. 또한 호석의 바깥쪽 바닥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정연하게 돌려 깔았으며, 봉토 주변을 둘러 석주(石柱)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에 2개씩 돌난간을 끼웠다. 비교적 얕게 부조한 12지신상은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오상(午像)만이 정면(남쪽)을 보고 있다. 또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의 6상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미신유술해(未申酉戌亥)의 5상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즉 양 측면에서 모두 오상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는 배치를 취했다. 봉분 주위에 이렇게 12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며, 특히 괘릉의 12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 가장 잘 갖추어진 형식으로 평가되는 괘릉은 능 입구에 세워진 석상(石像)으로도 유명하다. 봉분에서 남쪽으로 약 80m 정도 떨어져서 길 양쪽에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2쌍, 각기 1쌍씩의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그리고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배치했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물로는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극히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며, 특히 강한 인상을 주는 무인상은 얼굴생김이나 표정, 수염 등으로 보아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것으로 판단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국제적인 교역관계를 생각케 하는 데서 주목을 끈다.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성왕의 능은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최치원이 지은 대숭복사비문에 따르면 원래 신라 귀족 김원량(金元良)이 자신의 별장을 희사하여 곡사라는 절을 만들었으나 원성왕이 죽으면서 장지(葬地)로 선정되어 절을 옮겼고, 경문왕 때는 능역(陵域)의 수호에 각별한 정성을 들였으며, 헌강왕 때에 와서 옮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괘릉 부근에는 숭복사터가 있으므로 괘릉을 원성왕릉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경주 괘릉의 야사

 

경주 뢔릉의 괘는 '걸다'의 뜻을 가지는 괘이며 시체를 걸어 안장해서 괘릉이라는 이름이 유래가 되었다. 이곳엔 원래 작은 연못이엇는데, 왕의 유해를 수면에 돌을 길게 걸어 놓고 안치를 하였다 하여 걸다의 괘를 가진 괘릉이라 유래 되었다 한다.

 

괘릉의 축조방식 역시 신라의 분묘제도를 아주 잘 반영한 묘로 봉분 아래 둘레엔 십이지신상의 호석이 새겨져 있고, 능 입구엔 문인과 무인 각 한쌍씩 배치되어 문무의 중용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서역인의 상이 새겨져 있어 신라의 무역이 세계로 뻗어 나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인 원성왕은 물로 인해 왕위에 올라섰고, 죽음에 이르러 물위에 안장되었던 연유가 있다.

 

원성왕의 본명은 김경신이다.

 

서기 785년 선덕왕이 후사가 없음에 유력한 인물로 떠오른 이가 무열왕 6세 후손인 김주원이었는데, 당시 홍수로 인해 김주원이 궁궐에 입궐할수 없음에 이를 하늘의 뜻이라 여겨 내물왕 12세손인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하루의 해가 12개라면 두개를 나누어

 

하나는 아침이요

하나는 해질녁이요...

 

열두번째의 해가 나리는 저녁 무렵 괘릉을 거닌다...

 

 

 

 

 

 

 

 

 

 

 

 

괘릉의 역사와 무구한 설화 많지만...

 

그냥...

 

해질녘 모습이 좋아서...

 

 

 

 

 

 

 

 

 

 

 

얼마전 보았던 그모습과는 달리

 

열두번째 해의 모습엔

 

석상들의 모습들에 해님의 양각이 새겨져 있으니...

 

 

 

 

 

 

 

 

 

 

 

 

 

 

 

 

 

 

 

 

 

 

 

 

 

 

 

 

 

 

 

 

 

 

 

 

 

 

 

 

 

 

 

 

 

 

 

 

 

 

 

 

 

 

 

 

 

 

 

 

 

 

 

 

 

 

 

 

 

 

 

 

 

 

 

 

 

 

 

 

 

 

 

 

 

 

 

 

 

 

 

 

 

 

 

 

 

 

 

 

 

 

 

 

 

 

짧은 동선의 괘릉이라 여겼건만

머무는 동안 마시는 물은 한통이라...

 

과히

연못의 자리에 위치한 괘릉인가...^^

 

 

 

 

 

 

 

 

 

하루의 해가 열두개인줄 어찌 알겠냐마는

선조들의 가르침이 '12' 라고 하니 그런줄 여기니...

 

그러고 보면...

 

이제 마음속 치기가 사라지고

조금씩 순응하는 것을 보니...

 

 

철이 들려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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