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송나라(420~479) 범영이 쓴 역사책 후한서 채옹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후한 말의 대학자인 채옹이란 사람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하다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얼마 후 채옹의 방 앞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마주보면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칭송했다. 이때부터 연리지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을 나타내는 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세월이 한참 지나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한 시에 인용되며서부터 연리지는 남녀 사이의 변함 없는 사랑의 뜻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
서기 736년 무혜왕비를 잃고 방황하던 56세 현종은, 남도 아닌 자신의 열여덟번째 아들 수왕 이모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제왕이 하는 일에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한 왕조시대의 사람들이었지만, 훗날 양귀비가 된 스물두살짜리 며느리와 사랑 놀음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비극으로 끝난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양귀비가 죽고 50여 년이 지난 서기 806년, 유명한 시인 백거이(백낙천)에 의하여 '장한가' 라는 대서사시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당태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백거이가 이렇게 노래 하였다.
칠월칠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두 사람은 은밀한 약속을 하는데 우리가 하늘에서 만나면 비익조가 되고, 이승에서 다시 만나면 연리지가 되세...
중국의 전설에 비익조는 눈도 날개도 한쪽만 있는 새다. 암수가 합치지 않으면 날 수 없는 신화 속의 새이다. 연리지는 물론 두 나무의 가지가 합쳐 하나가 되어야 만들어지는 나무이다.
이후 수많은 중국인들의 사랑 이야기에 연리지는 단골손님이 된다. 남�의 사랑에 한정시키지 않고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때로는 선비들의 우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서민들 사이에선 이 나무에 빌면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는 믿음이 유행했다.
또 연리지에 올라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 연인이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바로 그 연인에게 상사병이 옮겨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내물왕 7년(362년) 4월에 시조 묘의 나무가 연리 되었으며, 고구려 양원와 2년(546년) 2월에 서울의ㅣ배나무가 연리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에도 광종 24년(973년) 2월에 서울 덕서리에 연리지가 났으면, 성종 6년(987년)에 충주에서도 연리지가 생겨 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연리지의 출현을 일일이 역사책에 기록할 만큼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로 생각한 것이다.
고려 중기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의 고율시에
'그대 비록 후배라 함께 공부 안 했으나
연리지 나무처럼 한집안 형제 같네
'난새는 짝 잃으면 못 떠나고 방황하네
초목 중엔 연리지가 의좋기로 소문나니
꽃 마음은 한가지나 꽃답기는 다르도다
부부가 없다면 짝이 어찌 될 것이며
형제 또한 없다면 기러기가 어이 줄서 가랴...'
하며 친구 사이의 우정과 혈육의 정을 연리지에 비유했다.
또 김시습의 금오신화에도
'연리지 가지 끝엔 붉은 꽃
서러워라 내 인생 나무만도 못하구나
박명한 이청춘 물만 고이네'
라고 하여 저승에서 나누게 되는 사랑의 서러움을 연리지와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연리지는 나타나는 것 자체가 희귀하며 사랑의 상징으로써 예로부터 상서롭게 여겨왔다. 기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연리지가 최근 잇달아 알려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자진해서 나타난게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는 현장을 들킨 것이다.
- 좋은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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